[한인사회소식] 부고 - 미주 한인 최초 주류 언론인 이경원 대기자 향년 9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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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도미 후 우연히 기자의 길로 들어선 “이철수 사건” 인터뷰 계기로 동양인 인권운동에

이경원 대기자 (이경원리더십센터)

초보기자로 활약하던 당시의 이경원기자 (이경원리더십센터 )
한인 최초의 주류언론 기자로 대기자의 칭호를 듣는 이경원 씨가 지난 3월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다.
고 이경원 씨는 한인 최초 미국 신문기자로 20세기를 빛낸 언론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한국과 미국 양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1928년 개성에서 태어난 이 씨는 1949년 말 고려대를 중퇴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보름 동안 배를 타고 이듬해 1월에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죠.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고 하면 중국 어디에 있는 곳이냐고 물을 정도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유학생이었던 그가 기자가 된 건 우연이었다. 애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계획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장기독재를 비판하는 칼럼을 현지 언론에 기고했다는 이유로 여권이 말소됐다. “비자까지 만료되면서 국제미아가 됐어요. 미국에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100곳이 넘는 언론사에 지원서를 냈는데 운 좋게 테네시주의 킹스포트 타임즈라는 지역 언론사에서 저를 받아줬죠.”
70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유력 언론이자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기자생활을 했던 곳으로 유명한 ‘새크라멘토 유니언’에 입사했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주요일간지 기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유일한 동양인 기자였던 그는 미국내 소수 인종의 인권 문제를 다루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이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동양인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철수 사건’을 꼽았다. 그는 78년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은 이철수 사건의 진상을 특종 보도해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사건은 이후 로버트다우니주니어 주연의 영화 ‘True Believer(신봉자)’로 만들어질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이씨는 언론인 명예의 전당인 워싱턴의 언론박물관 ‘뉴지엄’(Newseum)에 20세기를 빛낸 ‘언론인 500인’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으로 등재돼 있다.
고인은 프레스 클럽에서 주관하는 더 내셔널 헤드라이너 상을 받았으며 퓰리처상 후보에 오르는 등 기자 생활 동안 최소 29개의 특종상을 수상했다.
또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알링턴 언론 기념관에 20세기를 빛낸 500명의 언론인에 포함되는 명예를 안기도 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을 중심으로 북가주에서 예정되 있으며 LA에서도 고 이경원 대기자의 추모식이 열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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