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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비지니스] 사람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바로 잡는 – 조이척추신경병원

작성자 : 사람과사회 작성일 : 2023-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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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에게 카이로프랙틱 바로 알리는 것이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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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한반도를 대표하는 우리 민족의 고유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고 한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약 1400㎞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한다. 그리고 이 백두대간을 한반도의 척추라고도 부른다. 거꾸로 생각하면 사람의 척추가 한반도의 백두대간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그만큼 한국 사람은 허리로 대유되는 척추를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불행히 척추를 어떻게 관리해야 건강한지, 아팠을 때는 어떤 증상이 나는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척추신경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의학분야인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을 제대로 아는 한인들은 더더욱 드물다. 20여 년을 척추신경 전문의로 살아 온 조이척추신경병원(Joy Chiropractic) 조이 김 원장이 안타까워하는 이유다.



카이로프랙틱 바로 알리기


 조이척추신경병원 조이 김 원장은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것이 있다. 더욱더 많은 한인들에게 카이로프랙틱에 대해 제대로 알리자는 바람이다. 허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을 들여 허리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조이 김 원장은 처음 만나는 환자들에게 많은 정성을 들인다. 시간을 내 환자의 현상태와 치료과정, 치료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한다. 수 십 년을 반복하다보니 이제는 첫 환자를 만나는 과정이 하나의 루틴으로 짜여 있다. 증상 청취, 엑스레이 촬영, 통증완화 치료, 치료상담 그리고 본격적인 원인치료의 순이다.

조이 김 원장의 말이다. “환자가 오면 일단 증상을 듣고 엑스레이를 찍어요. 그리고 급하게 통증을 완화해 주는 치료를 합니다. 일단 급한 통증이 가라앉으면 엑스레이 검사를 토대로 환자의 상태와 치료과정에 대해 설명합니다. 한인들이 카이로프랙틱 분야에 대해 잘 모르고 단순히 교통사고가 나면 통증만 없애기 위해 들르는 곳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치료의 원리와 필요성 등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려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조이 김 원장은 대부분의 한인들이 고통에 가까운 증상이 있을 때 카이로프랙틱 병원을 찾는다는 것을 알기에 통증 완화 치료를 먼저 실시한다. 어느 정도의 통증이 사라지고 나야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이 김 원장이 이토록 카이로프랙틱을 알리는 것을 열정적인 이유가 있다. 유년기부터 청소년기를 거치는 20여 년을 고통과 씨름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더 답답한 것은 어디를 가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김 원장이 우연히 카이로프랙틱을 만나 통증에서 자유로워졌다. 카이로프랙틱은 김 원장의 삶의 고백이기에 그렇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인들에게 카이로프랙틱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환자들을 보다 보면 조금만 더 일찍 와서 도움을 받았으면 충분히 치료되거나 완치될 수 있는데 때를 놓쳐 더이상 걸을 수 없게 되거나 삶의 질이 확 떨어지는 것을 많이 봤어요. 그럴 때마다 카이로프랙틱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주류사회 척추관리 문화)이 너무 부러워요”



병든 닭 같은 삶에서


 조이 김 원장은 대학진학 후 카이로프랙틱을 만나기 전까지는 병든 닭 같은 삶을 살았다. 늘 머리가 아프고, 소화도 안 되고, 때로는 숨까지 헐떡였다. 김 원장의 부모는 딸이 아파하는 모습만 보면 억장이 무너졌다.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다녔다. 좋다는 약은 다 먹었다. 하지만 김 원장을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했다.


 “저는 하도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아파서 그런지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아픈 것으로만 생각했어요. 늘 두통이 있었고 두통 때문에 찡그린 얼굴이 내 얼굴이 되고 말았어요. 시험 때가 돼서 공부를 하려고 해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김 원장은 고통을 피하려고 일부러 새벽에 일어나 쫓기듯 공부했다. 고통에서 잠깐 풀려난 시간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날마다 반복되는 불편함, 무엇인가 짓누르는 뜻한 컨디션을 이끌고 김 원장은 UCLA 생화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진학 후 얼마 안 되고 UCLA병원을 갔어요. 엑스레이도 찍고 다양한 검사를 했어요. 하지만 모두 정상으로 나왔어요. 나는 계속 아프고 힘든데 검사 결과는 정상이니 더욱 답답했어요”


 대학에 진학 후 종합병원을 찾았을 때 김 원장은 무엇인가 실오라기 하나라도 잡힐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과거에도 수 없이 받아 온 검사들을 다시 받기로 한 것은 큰 병원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하나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김 원장의 바람은 물거품이 돼 공중으로 사라졌다. 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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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방향을 바꾼 계기


 머리가 아프고 때로는 소화도 어렵고, 메스꺼울 때도 있고, 숨이 차 헐떡일 때도 있었다. 증상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그런데 검사 결과는 정상이다. 결과를 듣고 안심이 되기보다는 더 두려웠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는 조이 김 원장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생겼다. 기대없이 찾아간 카이로프랙틱에서 삶의 방향이 바꿨다.


 “병원에 처음 갔을 때 저를 진료한 선생님이 엑스레이만 보고 제 증상을 말해주는 거여요. 조이 지금까지 머리가 계속 아프지 않았어? 가끔은 소화도 안되고, 답답하기도 하고, 기운도 없고, 변비도 있었을 것 같고… 라고 말하더라고요. 단지 엑스레이 필름 한 장만 보고요”


 김 원장은 너무 놀랬다. 한 장의 엑스레이에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이 느껴온 통증이 다 담겨 있었나? 이게 말이 되나? 하지만 눈앞에서 그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첫 경험은 계속된 치료를 통해 확신으로 바뀌었다. 점차 두통이 사라지고 불편함이 없어졌다. 다른 분야처럼 거창한 치료가 동반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때까지 김 원장을 따라다녔던 불편함은 점차 김 원장과 이별을 고해 갔다.


 “(카이로프랙틱의 치료 원리를) 쉽게 설명하면 마치 물 호스와 같아요. 다양한 신경조직을 중추신경을 통해 뻗어 가는데 불안정한 자세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호스가 막히게 되고 그 막힌 것이 원활한 신경전달이 이뤄지지 않게 방해하는 거죠. 카이로프랙틱 치료를 통해 그 눌린 곳을 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루하게 따라다녔던 고통에서 벗어난 조이 김 원장은 새로운 열정에 휩쌓였다. 자신이 몰랐던 분야,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삶이 바뀐 분야, 그 분야를 알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다시 학교에 진학했다. 카이로프랙틱을 공부하기 위해서 다시 긴 과정의 문을 열었다.



열정에 휩싸인 삶


 일반적으로 카이로프랙틱 과정은 10학기로 되어 있다. 정규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5년을 공부하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학과들이 그렇듯 첫 몇 학기는 그 분야의 기초적인 지식을 습득한다. 일반의대에서 배우는 기초과학 및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검진학, 소아학, 노인학, 방사선학 등이다. 


 “대부분이 일 년에 두 학기를 공부했어요. 하지만 저는 일 년에 세 학기를 공부했어요. 방학은 1주에서 2주 정도 갖고, 공부에만 집중했어요. 처음 몇 학기는 공부만 했지만 좀 익숙해지고 난 후에는 세미나도 쫓아다니고, 주말에 인턴도 하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김 원장은 악바리 같이 공부했다. 자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이 뭔지 빨리 알고 싶었고, 많이 알고 싶었다. 공부 시간도 단축했다. 빨리 졸업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답을 찾고 싶어서였다.


 “주말이 되면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는 유명 선생님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많이 가졌어요. 세미나가 끝나면 일부러 강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만나서 현장실습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주중에는 공부하고 주말에서 병원에 가서 인턴생활을 했어요”


 김 원장은 스스로 이론과 실습을 반복하는 공부를 했다. 학교에서 이론을 공부하고 그 이론이 현장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확인해 갔다. 남들이 쉬는 주말에 하나하나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 갔다.


 실습을 요청한 대부분 카이로프랙틱 병원에서는 조이 김 원장을 환영했다. 돈을 주지 않고 사람을 쓸 수 있다는 현실적인 생각에서도 그렇지만 김 원장의 열정이 선배 의사들의 마음을 녹였다. 기뜩 할 수 밖에 없는 발버둥을 보고 더 알려주고 싶어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닥터라고 불러주는 것도 좋았어요. 아직 학생이었음에도 현장에 가면 ‘닥터 김, 닥터 김’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았죠. 그리고 그때쯤 한인들은 어떻게 할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다시 한인 의사들을 찾기 시작했어요”


 김 원장은 한인 선배들을 찾았다. 그리고 매번 그렇게 하듯 자신을 소개하고 배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 한인들이 카이로프랙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갔다. 그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김 원장은 또 몸이 근질근질 해졌다. 


 이번엔 전국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마음이 갔다. 평일에도 세미나가 열리면 달려갔다. 전국을 누볐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물론 세미나가 열리면 어디든 일단 신청했다. 컨벤션의 도시인 라스베가스는 집안 드나들듯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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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으로 문을 연 병원


 기초 의과 과목을 포함해 특수검진, 치료법, 물리치료, 운동처방, 영양처방 등의 전문 교과과정을 모두 마친 후 4차에 걸친 국가고시(National Board)와 주고시(State Board)를 통과해야 카이로프랙틱 의사로 치료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5년에 걸쳐 이 과정을 밟는다. 하지만 김 원장의 열정은 3년 반 만에 모든 과정을 마치게 했다. 


 졸업 후 박사학위를 받은 조이 김 원장은 의사로서 첫 문도 남다르게 열었다. 샌디에이고의 한 병원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찾아갔다. 자신을 소개하고 일하고 싶다고 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하늘이 김 원장의 열정을 외면하지 않아서일까. 연락한 병원에서 흔쾌히 답을 왔다. 당시 병원에서도 환영 할 만한 것이 지역의 한인들이 점차 늘어가고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스텝이 있다는 것이 강점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던 터였다.


 “처음에 그냥 찾아간 곳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이 당시 이 분야 협회의 회장이셨어요. 저는 병원 일도 배우고 협회 일도 배우고 너무 좋았죠. 그분을 따라 한 3년 정도 일하고 나니 서서히 병원을 개원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조이 김 원장은 그제서야 자신의 이름이 붙은 병원을 열었다. 샌디에이고에서 열었던 병원이 삶이 옮겨 감에 따라 밸리로, 밸리에서 다시 풀러튼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역을 한 번 옮길 때마다 양쪽을 모두 다녀야 할 상황이 생겼어요. 병원에서 제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럴 때는 병원을 여기저기 다녀야 했어요”


 김 원장은 자신을 믿고 치료를 따라와 준 환자들을 병원이 이전했다며 하루아침에 저버리기가 불편했다. 할 수 있는 한 어느 정도는 계속해서 도와야 한다는 마음에서 병원을 오갔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김 원장을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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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아픔을 먼저 알아


 조이 김 원장이 풀러튼에 삶을 풀고도 밸리에 있는 병원을 돌봐야 했던 때였다. 밸리 병원을 다녀오던 중 옆을 달리던 차가 다른 차를 피하려고 핸들을 틀면서 하면서 김 원장의 차를 들이받았다. 천운이었다. 사고의 규모에 비해 김 원장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후유증이 고통으로 남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건 제가 환자들의 아픔을 먼저 겪을 수 있는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거여요. 카이로프랙틱에 대한 것도 제가 아파봤기 때문에 환자들의 마음을 알았어요. 그리고 풀러튼으로 옮기고 얼마 안가 환자 치료에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큰 맘 먹고 구입한 감압 디스크 치료기 DRX 9000을 교통사고 때문에 제가 사용해 보고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어요”


 순간순간 자신의 삶을 통해 카이로프랙틱의 효과를 확인해 온 조이 김 원장은 환자들이 오면 당부하듯 먼저 확인하는 것이 있다. 시간을 놓쳐 치료할 수 없을 때 오면 자신도 도울 수 없다는 점과 불신을 갖고 치료과정을 따라와 주지 않으면 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생각해 보면 할머니들이 머리에 흰 수건을 띠고 시름시름 앓고 계셨던 것이 많이 생각나요. 당시 어른들은 그냥 때가 되면 앓는 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살면서 틀어진 척추가 신경을 누르고 그것이 알 수 없는 병처럼 증상을 보였던 것 같아요”


 “신경을 눌러서 오는 고통은 어디가 부러지거나 다친 것이 아니고 또 혈압이나 당뇨처럼 수치로 확인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어서 꾀병이나 엄살이 심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릴 때가 많아요. 환자 스스로도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하고요. 그러다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한인들을 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조이 김 원장이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만 아픈 환자가 있다. 60대 초반, 편안한 노년의 이민 삶을 살아 보겠다고 일만 해 온 한인이었다. 돈이 모이고 젊을 때부터 꿈꿔온 할리데이비슨도 구입했다. 하지만 그의 척추가 더이상 그를 버텨주지 못했다. 수술하고도 완쾌될 수 없었다. 걸음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는 것이 중요해요.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허리나 목이 뻐근하다고 느끼면 병원에 오는 것이 좋아요. 손발저림이 느껴지는 경우도 많은 부분 척추에서 신경을 누르기 때문에 그래요. 알고보면 척추나 허리도 치아와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회복하기 어려워요. 한인들에게 카이로프랙틱이 교통사고 나면 찾는 곳이 아니라 살면서 불편함을 느끼면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 됐으면 해요. 나이가 들어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고 싶은 희망이 있는 분들이라면 더욱더 척추관리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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